[공모전] 수습 기록관.3

2019.10.17 01:15 조회수 100

#공모전 #디아르노셀



  

페란의 말에 따르면 목표로 하고 있는 ‘미상의 괴물’은 나우르의 가장 큰 숲 중 하나인, ‘회한의 숲’에 있다는 것 같다. 이름조차 뜨뜻미지근한 숲에 숨어서 호시탐탐 나무꾼을 노리는 괴수의 모습이 살짝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그런데, 기록관 양반은 무슨 이유로 이런 일에 자원했지?”

  


게보그는 잠시의 침묵도 견딜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의 진영은 이렇다. 앞에서 페란이 일행을 이끌고, 바로 뒤에 엘과 에레나가 붙어 호위와 주변의 감시를 한다. 원호를 맡은 에디는 1선과 최후방 사이에 배치되어있다. 원래라면 에디가 나와 동행해야하지만, 페란의 지시로 호위는 게보그가 맡게 되었다.

  


“자원이라기보다는, 스승님의 명령으로 왔다고 봐야죠.”

“명령? 이 일이 그렇게나 중요했다니, 나도 몰랐어.”

  


게보그는 가볍게 웃었다. 그는 생각보다 가벼운 사람이었다. 한량 같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실없는 소리를 하며, 실없이 웃는 걸 좋아하는 사람 같다. 아니면 어딘가를 외면하기 위한 최선이라 생각해서 일지도 모른다. 실없이 사는 것이.

  


“게보그 씨도 아까 전에 엄청 진지하게 듣지 않았나요?”

“페란녀석이 충분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길래 말이야. 그런 척 했던 것뿐이지.”

“하긴, 나우르의 ‘에이기스’ 용병단이면….”

“쉿.”

  


에디가 검지로 입술을 누르며 말했다. 게보그는 전과 다르게 심각한 표정으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기록관 양반. 내 뒤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나는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면서도, 품에서 기록용 종이를 꺼냈다. 웬만한 일로 찢어지지 않고, 마법으로 파괴하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는, 시상의 탑에서만 사용하는 고급스러운 종이었다. 물론 그를 아는 것은 시상의 탑에서 나오지 않는 기록관뿐이다. 

잉크대신 검지에 마법을 부여해 펜처럼 휘갈기기 시작했다. 현재의 날씨, 습도, 그리고 바람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정적을 하나하나 기록한다. 이제 시작인 건가. 가슴을 움츠리지 않는다면 내 심장소리가 바깥에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흥분되기 시작했다.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면, 펌프질 되어 올라오는 혈액의 밀집대형에 머리의 냉정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을 거다.


나는 냉정이란 단어를 소리 없이 중얼거리며 전열의 상황을 지켜봤다. 페란은 쭈그리고 앉은 채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고, 엘은 무릎을 꿇고 앉아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에레나는 임전태세 직전의 몸짓을 하고 있었고, 에디는 주변을 살피며 활에 화살을 먹이려고 하고 있었다.


  

“가, 가움의 터에…자, 자라나는 새싹들이 가득한 고목을 갉아 먹고 있…그, 그만. 제발…발, 발톱에 짓이겨!”

  


요동치던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의 괴성. 엘은 그만 쓰러져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에레나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검을 잡으려는 손으로 자신의 품에서 약병을 꺼내 엘에게 먹였다. 그리고 마치 그의 엄마라도 되는 듯 엘을 힘껏 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엘은 기록서에 나온 마물의 저주라도 받은 사람처럼 고통스러워했다. 에레나가 안고 있지 않았다면 그로테스크한 몸짓을 하며 괴성을 내지르지 않았을까.


나는 이 상황을 기록하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엘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설원을 덮은 푸른 하늘. 모든 구름을 설원에 빼앗긴 듯 창백하게 펼쳐진 그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그 하늘 아래 다시 설원. 그곳에는 탑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탑 하나밖에 없는 곳에 사람 하나가 있었다. 이런 오지에 어째서 ‘사람 하나’가 있는 걸까. 인지되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광경 속에서 그 사람 하나는 방황한다. 추위도 막지 못할 거적때기를 걸친 소년. 그 소년은 탑을 발견하지만 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죽음’



“어이, 정신 차리라고.”

  


게보그의 우람한 팔이 날 부축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주변에 머물던 침묵은 사라진 지 오래다. 경기를 일으키는 생물의 괴성과 나뭇잎이 바스러지는 소리, 그리고 적지 않은 발자국들의 소리. 

  


“준비해.”

“엘도 진정되었어. 페란.”

“게보그, 부탁한다.”

  


게보그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등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도끼를 쥐어들고 전방의 나무를 옆으로 크게 갈랐다. 나무 한 그루를 일격에 베어 넘기는 것도 대단할 지경인데, 그의 몸짓에 최소 열 그루가 되는 나무가 잘려 넘어갔다. 그 덕에 숲에 은신 중이던 괴수의 모습이 보였다. 통통한 몸에 가득 붙은 깃털. 길게 빠진 목과 다리, 날지 못하는 새 오스트리킨이었다. 새들도 놀란 듯 괴성을 지르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게보그는 큰 기합 소리와 함께 도끼를 내리찍었다. 

  


“에디, 에레나 게보그를 도와. 엘은 내가 돌본다.”

“원하시는 대로.”

“아르고, 내 뒤에 붙어.”


  

에디의 말에 기록을 멈추고 그의 등 뒤로 향했다. 페란은 엘을 업고, 그가 떨어지지 않게 천 같은 걸로 몸을 결속시켰다. 자신을 지켜야할 방패를 엘의 등 뒤에 달아버린 후, 반대편 숲에 숨어있던 오스트리킨을 쳐내기 시작했다. 

  


“전보다 수가 많아.”

“그래서 내가 온 거 아니겠어.”


  

에디는 능숙하게 활에 화살을 먹이고 오스트리킨의 미간을 노렸다. 속사의 달인답게 쓰러진 나무의 진동으로 떨어진 나뭇잎이 바닥에 도달하기도 전에 열댓 마리의 오스트리킨이 바닥에 쓰러졌다. 에레나는 그런 화살 사이로 돌진해 오스트리킨의 긴 다리를 토막 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한 몸처럼 모자란 괴수들을 도륙했다.

  


“대단하다.”

“평소의 절반정도라고.”

  


바닥에 꽂은 도끼를 들어 올리며 게보그가 말했다. 주변의 괴수들은 참상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을 부은 찻잔에 차가 제대로 우려지기도 전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처음에 든 생각은 흥분이었다. 책으로만 보았던 괴수의 사냥과 나우르의 용병집단이 딱딱한 삽화에서 떨어져 나와, 실제로 움직이고 있다니! 에디의 맹금류 같은 날쌘 동작과 한 마리의 유연한 뱀을 연상케 하는 에레나의 몸짓, 그리고 사람이라고 보기 힘든 게보그의 괴력까지. 나의 부족한 실력으로 제대로 기록해내기엔 부족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 흥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 멀리에서부터 울려 퍼진 소리. 도저히 이 세상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흉포한 울음소리에 뜨겁게 끓던 심장은 차가운 물에 잠긴 듯 서늘한 감촉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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